2022-04-18[중부일보][학예사기고] 신라 북방진출의 서막, 낭비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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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58회 작성일 22-08-18 16:52본문
신라를 삼국의 패권국가로 일으킨 진평왕은 629년 (진평왕 51) 8월 북방진출의 전략적 요충지인 낭비성(娘臂城) 공략을 명했다.
◇고구려의 낭비성인 포천 반월성=포천 반월성은 남북으로 이루어진 산맥 사이로 평탄한 지형이 형성된 ‘추가령구조곡’을 따라 관북지방(함경도)과 서울을 연결하는 경흥로(관북로)의 교통 요충지에 축조되었다. 특히 양주지역과 중랑천을 따라 한강과 연결되어 한반도 중부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중요한 군사시설이었다. 따라서 고구려는 한강 진출과 남진 정책을 위해 반월성을 거점으로 활용하였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신라의 북진을 방어하기 위해 낭비성을 운영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낭비성의 위치에 대해 청주지역, 파주 칠중성, 포천 반월성 등이 대표적으로 지목되었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에서 7세기 초 신라의 영역이 한강과 임진강 하류 유역을 점령했지만 포천지역은 당시까지 고구려의 영토에 속하고 있었으며, 발굴조사에서 고구려의 포천지역 지명인 ‘마홀(馬忽)’ 명문기와를 비롯해 6세기 말을 전후한 고구려 유물이 출토되고 있어, 고구려의 낭비성을 포천 반월성으로 파악하고 있다.
◇신라 삼국통일의 시작, 낭비성 전투=신라는 6세기 중반 한강유역을 점령하고 북방진출을 위해 고구려를 지속적으로 견제하였다. 신라의 한강 이북 군사거점인 북한산성이 고구려의 직접적인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경기 북부지역 중 한강과 육로로 직접 연결되는 포천지역을 반드시 확보하고자 했다.
7세기 초 신라의 진평왕은 한강유역의 지배권을 확대하기 위해 고구려 영토를 점령하고자 629년(진평왕 51년) 8월 경기 북부지역 중 고구려의 최대 전략적 요충지이며 최남단 방어기지인 낭비성 공격을 명하였다. 이에 따라 당대 최고의 장군인 김용춘(金龍春), 김서현(金舒玄) 등 5명의 장수와 당시까지는 소규모 부대를 이끌었던 김유신(金庾信) 등이 참전하였다.
전투 초기에는 고구려군의 기백에 눌려 신라군에게 전세(戰勢)가 불리했지만, 김유신이 충정을 맹세하고 고구려군 진영을 휩쓸고 다니며 승기를 잡아 5천 명의 목을 베고 1천 명을 사로잡는 큰 성과를 올렸다. 당시 고구려군의 규모를 약 7천~8천 명으로 추정하는데, 병력의 약 80% 정도의 피해가 발생한 것이다.
김유신은 낭비성 전투에 장군이 아닌 중당당주(中幢幢主, 군관)로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웠으며, 이를 기반으로 장군의 자리에 올라 신라의 삼국통일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삼국시대 한강 이북 방어시설의 거점=포천지역은 지리적으로 경흥로의 육로를 통해 남북이 연결되고 영평천, 한탄강, 임진강 등 수로를 통해 동서가 연결되었다. 때문에 경기 북부지역을 방어하는 산성들은 철원에서 포천으로 통하는 남북교통로(경흥로)를 방어축으로 삼아 남북 방향으로 축조되었다. 그리고 하천을 자연적인 장애물로 활용해 동서를 잇는 산성을 축성하여 ‘십자’ 모양의 방어 체계를 구축하였다. 포천에는 남북축으로 냉정리 산성(포천 관인면), 성동리 산성(포천 영중면), 반월성(포천 군내면), 고모리 산성(포천 소흘읍)이 있었으며, 동서축으로 대전리 산성(옛 포천 청산면), 고소성(포천 창수면), 주원리 산성(포천 창수면), 성동리 산성(포천 영중면) 등이 축조되어 유기적인 방어체계를 구축하였다.
최동원 포천시 지질공원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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